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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설화전설

신리

위치

신리(新里)는 지천면의 중심에 위치하며, 총 670戶(호)에 인구는 1,800여명으로 각급기관이 모두 이곳에 있다.

연혁

신 1, 2리는 본래 칠곡군 상지면(漆谷郡 上枝面)의 지역으로서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역이 생기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새마 또는 신동(新洞)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폐합 때 중동(中洞)과 와동(瓦洞), 평동(坪洞), 하동(下洞), 사창동(司昌洞)과 도촌면(道村面)의 중리(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동이라해서 지천면(枝川面)에 편입되어 현재 신1리는 신리와 웃점, 신2리는 아랫점과 내실로 구분되고 있다. 신3, 4리는 중동(中洞), 평동(坪洞), 와동(瓦洞), 하동(下洞), 사창(司昌)등 5개의 자연부락을 합한 지역이다.

신1리

신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신리(新里)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역이 생기자 인가가 모여들어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신동(新洞)이라 했는데 지천면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초 · 중 · 고교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현재는 김해김씨, 광주이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웃점(上店) 이곳에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어 점마(店村)라 하는데 점마는 웃점과 아랫점으로 구분되고 있다. 옹기굴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약 100년전으로 추정된다.
땅골 · 당곡(塘谷) 신동역앞 산지기의 집 한 채가 있는 골짜기이며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아랫점 · 하점(下店) 옛날 신동의 아랫마을에 옹기를 팔았다 하여 하점이라 불렀다.

신 2리

신2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내실(內室) 설촌(設村) 연대는 미상이나 본래 5가구가 살고 있는데 1905년 경부선과 국도가 소통됨에 따라 정착민이 늘어나자 주민들이 가풍 문란을 염려하여 문단속, 여인단속을 엄하게 함에 따라 내실이라 칭하였다. (각성집촌)

신 3, 4리

신3·4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웃갓(上枝) 약 500년전 성종조 때 광주이(廣州李)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중종조 정승을 지낸 김수(金洙) 등 많은 인물이 예부터 세거하였다. 마을의 생김새가 매화나무의 윗가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상지라 불리우고 있다. 광주이씨, 벽진이씨, 진주강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중동(中洞) 상지촌 중심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동이라 했다.
서운마 · 서원(書院) 조선시대 서양서원이 있어서 유래 되었으며 60년대 만든 낙화담이란 못이 있다
평동(坪洞) 상지촌 북쪽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평촌(坪村)이라 했다.
와동(瓦洞) 상지촌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기와집이 많다고 해서 와동이라 했다.
하동(下洞) 산지촌의 남쪽에 있어 하동이라 했다.
사창(司昌) 옛날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사창(司昌)이란 같은 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특징

  • 문화촌
    내실은 1980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마을 전체의 주택이 모두 현대식 건물로서 도시형 문화촌으로 바뀌어 생활환경이 크게 향상된 마을이다 .

송정리

위치

송정리(松亭里)는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총 119戶에 인구는 299명으로 남서쪽으로 대구 달성군 하빈면과 접하고 있다.

연혁

송정리는 원래 칠곡군 상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도당리와 도촌면의 중리와 금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동’이라해서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옛날 원곡마을 앞 하마천(下馬川) 제방에 노송이 수십그루가 우거져 숲을 이루어 좋은 정자로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해서 송정(松亭)이라 했다.
송정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중리(中里) 송정리의 중심 마을이라 해서 중리라 하며, 상중리와 하중리를 합해서 부르는 지칭이다.
금정리(金亭里) 하중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이 마을에 수정(水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해서 수정리라고도 한다.
원곡(元谷) 상중리 동북쪽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뒷산에 조선조 인조 때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낸 석담(石潭) 이윤우공(李潤雨公)의 묘가 있는데 국가의 원로대작의 묘가 있다고 해서 원곡이라 불려오고 있다.
도당(陶塘) 원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마을 뒷산에 도자기 굽는 가마가 있었던 곳인데 마을 앞에 있는 지당(池塘)과 두곳의 이름을 따서 도당이라 했다.

금호리

위치

금호리는 지천면에서 서쪽으로 약 7.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북으로는 금무봉이 솟아 있으며 서편으로는 금산, 남으로는 팔평산, 동으로는 도지산이 둘러싸고 있어 분지에 형성된 5개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154戶로 인구는 334명이다.

연혁

금호리는 본래 칠곡군 도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불동(佛洞), 자원리, 빈주리 그리고 내도동의 일부와 노곡면의 왕방리를 병합하여 금무산(錦舞産)과 대정호(大汀湖)의 이름을 따서 ‘금호동’이라 하여 지천면에 편입 되었다.
금호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불 동(佛洞) 빈주(濱州)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뒷산에 불당이 있었다고 해서 ‘불동’이라 했으며 진주소씨(晉州蘇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왕방리(旺方里) 옛날 칠원윤씨(漆原尹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후 약 300년전 기계인(杞溪人) 유집기공(兪集基公)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자손들이 왕성하게 번창할 수 있는 명지라고 해서 왕방리로 불려오고 있다.
자원리(自元里) 마을 북쪽에 자원산(資元山)이 있어 마을명을 자원(自元)이라 불러 왔는데 동음이어(同音異語)로 표기되고 있으며 금호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신기리(新基里) 약 40여년전 해방 후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신기리로 불려오고 있다.
빈주리(濱州里) 자원리 서쪽에 위치하며, 진주소씨(晉州蘇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대정호반(大汀湖畔)에 위치한다해서 빈주로 불려오고 있다고 한다.

연화리

위치

연화리는 지천면에서 서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부선철로와 경부선고속도로 그리고 그 사이로 국도가 병행하면서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다. 209戶(호)로 인구는 471명이다.

연혁

연화리는 본래 칠곡군 도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중화동, 암동, 외도동, 내도동, 완정리를 병합하여 연화동이라 해서 칠곡군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도암지(道岩池)에 연꽃이 많다고 해서 ‘연화동’으로 개칭했다.

연화1리

연화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도촌(道村), 도탄(道灘) 내도동과 외도동을 합친 지칭으로 본래의 동명은 적촌(狄村)이라 했다. 옛날 이곳에 성지도사가 은거하다 떠난 곳이라 해서 목사 윤휘에 의해 ‘도촌’으로 개칭했다 하며, 옛날 마을 동북편으로 사라호가 있었는데 이 호반의 여울가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도탄’이라고도 했다.
‘디올’이란 지칭은 ‘도·여울’이 변하여 발음된 것이며, 조선 세종조 말엽에 야성송씨(冶城宋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연화2리

연화2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완정(浣亭) 사라지 못아래에 작은 폭포와 은행나무 정자가 있었다 해서 ‘완정’이라 했다. 금녕김씨(金寧金氏)가 처음으로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암(道岩)·도암(陶岩) 용소산 정상이 암석으로 형성되어 있어 처음에는 암동(巖洞)이라 했는데 이곳에 복숭아 나무가 있었다 해서 도암(桃巖)으로도 불렀다. 한편 한말 때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와서 설치한 도자기가마가 있었다 해서 도암(陶岩)이라고도 불려왔다.
신나무골·중화리(中化里) 1860년경에 천주교신도가 이곳으로 이주해와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하며, 마을 뒷산에 신나무가 많다 해서 신나무골로 불려왔다. ‘중화리’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알수 없다.

달서리

위치

달서리는 지천면에서 북으로 약 4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99戶(호)에 인구는 272명이다

연혁

달서리는 본래 칠곡군 상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동원동, 서원동과 석문동 일부를 병합하여 달방산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해서 ‘달성동’이라 하였다.
달서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원골(院谷) 옛날 한양으로 가던 길목으로서, 나그네가 숙박하던 집이 있다 하여 ‘원골’이라 하였다. 동편 마을 동원(洞院), 서편 마을을 서원(西院)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동마 · 서마로 칭한다.
돌문(石門) 「칠곡지」(漆谷誌)에 의하면 현감 송협과 그 아우 송흡 형제가 정착했던 구지(舊地)인데, 원사(院舍)가 있다는 표시로 남쪽 길목에다 높은 돌문을 세웠던 곳이기에 ‘돌문’이라 했다.

백운리

위치

백운리는 지천면에서 북으로 약 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위가 높은산으로 둘러싸인 산간오지에서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산촌이다. 47호에 인구는 94명이다.

연혁

백운리는 본래 칠곡군 상지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수정리, 남행리, 북행리와 석적면의 수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운산의 이름을 따서 백운동이라 하였다.
백운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행화(杏花) 길부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도공들이 모여 살면서 살구나무를 많이 심어 살구꽃 이름을 따서 ‘행화’라 불렸다.
질그릇골·길부(吉夫)·길부(吉阜) 고려때에는 이곳이 도요지(陶窯址)라 해서 ‘질구릇골’이라 불려왔으며, 질그릇이 와전되어 길붓이 되었다고 하며 백운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안길부와 바깥길부로 나뉜다.
여기터·예계(禮溪) 길부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 신라때부터 상주로 가는 길목으로서 역이 있었다. 역의 터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여기터라고 하며, 고려때에는 200호의 큰마을이었다고 한다. 또, 조선조때 서울로 과거길에 나선 영남선비들이 이곳에 유숙하면서 마을뒤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면 과거에 합격했다고 해서 ‘예계’라고도 불려왔다.

특징

청구공원

길부에서 동명면 송산리로 넘어가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는 청구공원은 1973년에 공원묘지로 개설되었고, 사무실 뒤로는 백운사가 있다.

창평리

위치

창평리는 지천면에서 북으로 약 3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창평지를 끼고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좋은 산촌이다. 155戶(호)에 인구는 429명이다.

연혁

창평리는 칠곡군 상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운정리, 완정리와 와동, 석문동, 사창, 장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창평동이라 해서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창평 1리

창평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사례골(乍禮(사례)) 사창 북쪽 사천변에 형성된 마을로서, 자갈이 많아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사창(司倉) 언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 사창(社倉)이 있었다 하여 사창(司倉)으로 불려왔으며, 약 200년전 광주이씨들의 정착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들마(坪村(평촌)) 사창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가 평지인 전담의 들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들마라고 한다.

창평 2리

창평2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대백리(大柏里)
완정리(完亭里)
옛날엔 완정리라고 불려왔다 하는데, 그후 이곳에 큰 잣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하천 대백리로 개칭되었다.
사천, 운정, 사기점(沙器店) 대백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한말 이곳에 흐르고 있는 내에서 좋은 모래가 나와 도공들이 모여 살면서 사기그릇을 만들어서 판 사기점이 있었다해서 내이름을 ‘사천’이라 하고 동명을 ‘사기점’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는 옛날 한양으로 과거길에 오른 영남선비들의 휴식소로서 구름도 쉬어간다는 구름정이 고개의 이름을 따서 운정이라고 불렀다.
재궁(齋宮) 옛날에 이곳에 재궁(북방에 있는 문)이 있었다 하여 재궁이라 불려왔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심천리

위치

심천리는 지천면에서 동으로 약 3㎞지점에 위치하며, 동서 양산맥사이에서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협곡에서 열촌(列村)으로 이루어진 취락형태이다. 105戶(호)에 인구는 258명이다.

연혁

창평리는 칠곡군 상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운정리, 완정리와 와동, 석문동, 사창, 장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창평동이라 해서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심천 1리

심천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심지(深池) 심천1리에서 중심위치에 있는 마을로 현재 8가구가 살고 있는데 가정자에서 북쪽으로 걸 건너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 마을앞에 깊은 연못이 있었다해서 심지(深池)라 불렸는데 인천채씨(仁川蔡氏)가 처음 정착한 마을이라 한다.
가정자(柯亭子) 심지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옛날 가죽나무가 많았다해서 가정자라 했다.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덕산이씨, 여주이씨, 벽진이씨들이 주성으로 살고 있다.
유곡(楡谷) 뒷골 서쪽 골짝에 누룹나무가 많다고 누룹실(유곡)이라 하였다.
도장곡(陶匠谷) 심지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곳에 옛날 도기굴의 도공들이 모여 살았다해서 도장곡이라 했다.
강장곡(姜壯谷) 심지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2가구가 살고 있다. 옛날 이곳에 힘이 센 강씨라는 장사가 살았다해서 강장사곡, 강장곡이라 불려왔다 함. 일설로는 장수장씨가 살았다고하여 장장골 이라고도 한다.

심천 2리

심천2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심천 심천부락은 약 260년전 영조 때 광주인 이붕운(李鵬運)공이 경주산내에서 우거하다가 상지로 환고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그 자손들이 세거지향(世居之鄕)으로 살아오고 있으며 현재 광주이씨 27가구만이 집성촌으로 살고 있다.
하심천 심천에 정착하여 살아온 광주이씨들에 의해 그후 새로이 설촌된 마을인데 현재 광주이씨 8가구만 살고 있다.
점촌·지내(池內) 심천 북쪽 건령산록 골짝에 위치한 마을인데 옛날 이곳에 옹기점이 있었다해서 점마(점촌)라 했는데 그 후 못이 형성되면서 못안(지내)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성주이씨, 경주이씨 등 2가구가 살고 있다.

덕산리

위치

덕산리는 지천면에서 동남으로 약 3㎞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으로는 오지봉(五枝奉)이 솟았고 동으로는 법전산이 남으로 길게 뻗었다. 그 서쪽을 따라 동배서향의 취학형태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 서면으로 이언천이 국도와 병행 남류하면서 서쪽으로 이언평야가 전개되어 자연경관이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교통도 편리하고 농사짓기에도 좋은 농촌이라 하겠다. 103戶(호)에 인구는 280명이다.

연혁

덕산리는 본래 칠곡군 이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적구역 개·폐합 때 판동과 상이, 시기의 각 일부지역과 상지면의 하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명을 덕산동이라해서 칠곡군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덕산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이언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중엽 때는 안동 권씨들이 이주해 와 살았다고 하며 그 후 약 250년전 영조 때 순천박씨(順天朴氏)가 150년 전에 이곳 이언을 택거지로 정하고 옮겨와 집성촌을 형성하고 오늘에 이른다. 마을앞에 이언천이 있어 동명을 이언이라 했는데 골음조현상에 따라 『이런』으로 불리고 있다.
널동(판동) 이언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 마을 뒤 법전산의 산림이 울창하여 거목이 많아 판재로 널(관)을 만들어 팔았다고 해서 널동이라 불려왔다.
시기 이언에서 북으로 덕산교회쪽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말 때 상지시장의 장터(시기)라해서 시기라 불려오는데 이곳 구장터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70년전으로 추정된다.
똑딱골·독도골(獨道谷) 옛날 신동령을 넘는 고독하고 긴 고개티가 시작되는 곳이라 해서 독도곡이라 하였으며 독도곡이 변하여 도닥골, 똑딱골이라 불리우고 있다.

특징

천시기우제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극심한 가뭄이 들면 현 신동시장을 이곳 구장터인 시기로 옮겨 개설하여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다고 하는데 일종의 특이한 천시기우제(遷市祈雨祭)를 올리고 있다.

영오리

위치

영오리는 지천면에서 경부선 철길을 따라 약 4㎞남쪽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으론 매복산이 솟았고 그 주맥이 남쪽으로 뻗어 니비티로 이어지면서 서쪽으로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마을 바로 앞 동편에는 경부선철로가 고속도로와 병행하여 남북으로 달리는데 그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철로 건너편으로 영오평야가 전개되고 있으며, 그 중앙으로 이언천이 남류하여 금호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106戶(호)에 인구는 260명이다.

연혁

영오리는 본래 칠곡군 이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오동, 영청, 상이동, 일부를 병합해서 영청, 오동 두 마을의 첫글자를 따서 영오동이라하고 칠곡군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영오1리

영오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먹골, 오동, 오곡, 미럭 영오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서 옛날 마을 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았다해서 오동, 오곡이라 불렸는데 ‘먹골’로도 불리고 있다. 또 마을 앞 밭 가운데에 머리가 없는 석불상이 서 있는데 미륵불이 서 있는 동네라하여 일명 『미륵』이라고 불리고 있다.
덕천 오동 북쪽 철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인데 임란 후 동래정씨들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내의 이름이 덕천이라 하여 동명도 덕천이라 했다.

영오2리

영오2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영청(永靑) 동네 부근에 맑은 연못이 있어, 나그네가 쉬어 가면서 맑은 연못을 보고 영청이라 불렀다 한다. 이후 표기가 바뀌어 동명도 영청이 되었다.
미실(米實) 미곡과 실과를 많이 수확할 수 있는 곳이라해서 동명을 미실이라 했다.

오산리

위치

오산리는 지천면에서 경부선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5㎞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 서, 남 3면이 산으로 낫골고개, 용현(龍峴)이 둘러싸고 있다. 동으로 오산평야가 전개되고 그 중앙으로 이언천이 남류하여 금호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마을 앞으로 달리고 있으며 대구시와 근접해 근교농업이 성하며 주변 산에 아카시아가 많아 양봉업도 성행되고 있다. 58戶(호)에 인구는 130명이다.

연혁

오산리 본래 칠곡군 이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만점, 내오, 만산, 영청, 외오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내오와 만산의 이름을 따서 동명을 오산이라 하였다.
오산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내오(內梧) 오산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한말 때 동래인(東萊人) 정천옥(鄭天沃)선비가 이곳으로 이주해와 살아오면서 현재 주성(主姓)을 이루고 있다.
외오(外梧) 내오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오산리에서 바깥쪽이 된다.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밝힐 수 없으나 약 150년전 파평인 윤자모공이 달성군 하빈면 대평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와 현재 주성을 이루고 있다.
밤지골(栗里) 마을 앞에 밤나무가 많았다하여 율리(栗里)로 불려왔다.
점촌(도맘주막) 밤지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용산리 도마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옛날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서 주점이 있었다해서 점촌이라 했다 .

용산리

위치

용산리는 지천면에서 남단 7㎞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금호강 동으로는 대구광역시와 접하고 있어 주민들의 생활권은 대구에 속한다. 105戶(호)에 인구는 246명이다.

연혁

용산리는 본래 칠곡군 이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외동동과 만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와룡산의 이름을 따서 동명을 용산동이라 해서 칠곡군지천면에 편입되었다.
용산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도맘·기산 용산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지형이 도마뱀 모양 같다 해서 도마원이라 부르기도 하고, 도마형극이라해서 기산으로도 불리고 있다.
예현·지천·역전 도맘 남쪽 지천역이 있는 마을인데 약 150년전 김해김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지천역이 들어서자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뒷산이 예현이라해서 동명도 예현(여릿티)로 불렸는데 지천역이 생기면서 「지천」또는 「역전」으로도 불려 왔다.
뱃가·강변 금호강변 철교(유개안다리) 밑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 도선장이므로 주막이 있어 여러가구가 살았으나 잠수교가 생긴 후부터 도선장이 없어지자 지금은 한적한 마을이다 .

연호리

위치

연호리는 지천면에서 국도를 따라 남으로 약 6㎞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으로 법전산을 등지고 있어 동향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 동편에는 국도가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으며 남에는 경부선 철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뒤 법전령(신동령)은 1970년대까지도 국도로 이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한가한 고갯길로서 산책로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정상에는 나환자촌이 형성되어 있다. 311戶에 인구는 729명이다.

연혁

연호동은 본래 칠곡군 이언면의 지역인데 가정동, 상내동을 병합하여 이곳 지형이 연화도수형이라 즉 연꽃이 호수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극이라해서 동명을 연호동이라 하고 칠곡군 지천면에 편입되었다.

연호1리

연호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연곡(鉛谷), 납곡(納谷) 연호리의 중심마을로서 옛날 마을 뒤 법전동(法田東) 납이 많이 산출되었다고 해서 연고, 납곡이라 했다.
가정(柯亭) 옥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날 가죽나무가 많았다하여 가정이라 했는데 능성구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대추나무가 많다.
구슬개의 전설 연곡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활 잘 쏘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늦은 봄날 낮잠을 자다가 꿈에 큰 고목나무 가지에서 까치 한 마리가 큰 뱀에 몸을 휘말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선비는 뱀을 쏘아 죽이고 까치를 살려 주었더니 이듬해 봄에 그 까치가 구슬같은 큰 알을 이곳에다 많이 낳았다고 한다. 그 후 이 곳을 구슬개로 불려왔는데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전해온다.

특징

수무실 약수터

가정리 뒷산에 약수터가 있는데 수무실 약수터로 불리고 있다 속병과 피부병에 좋다하여 원근의 많은 주민들이 찾아 왔으며 현재도 식수공해문제로 많은 시민들이 생수로 이용하기 위해 찾아온다

낙산리

위치

낙산리는 지천면에서 동남으로 약 8㎞지점에 위치하며 대구시와 접하여 칠곡군의 관문으로서 주민들의 생활권역이 대구에 속하고 있다. 사방산(四方山)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농촌마을로서 근교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가지와 오이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 현대공원 묘지와 시립공원묘지등이 조성되면서 자연경관이 공원묘지에 압도되고 있어 현곡(玄谷)이란 지명이 현실을 연상케한다. 212戶(호)에 인구는 529명이다.

연혁

낙산리는 원래 칠곡군 이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이곡리와 추동(곡)을 병합하여 이곳 낙산서원의 이름을 따서 동명을 낙산동이라 하여 칠곡군 지천면에 편입되었다.

낙산1리

낙산1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가무실 낙산리에 중심되는 마을로 약 200년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곳 토질이 검고 붉은 땅이라 하여 현곡이라 불려왔으며, 현재 『웃가무실』과 『아랫가무실』의 두자연부락의 합칭을 가무실이라 한다.
가래골·추곡 현곡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인데 옛날 이 동네에는 호도과에 속하는 가래나무(추자)가 많았다하여 추곡 · 추동이라 불려왔으며 현재는 가래골이 가라골로 불리고 있다.
새마을 1965년 5월 25가구의 주민들이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정착함으로써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새마을로 불리고 있다 .

황학리

위치

황학리는 지천면에서 북으로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산중벽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북으로는 가산면 학산리, 서로는 석적면 도개리와 왜관의 봉계리, 남으로는 백운리와 접하고 있으며, 48戶에 인구는 107명이다.

연혁

황학리는 본래 석적면 지역으로서 황학산 바로 아래라 ‘황학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수창동을 병합하여 다시 황학동이라 해서 칠곡군 석적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따라 지천면으로 편입되었다.
황학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황학 (黃鶴) 임진왜란 때 피난지로 알려진 곳이며, 인동장씨(仁同張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주변 마을에서 이곳으로 피난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수정 (水晶) 마을 앞 시내가 항상 수정같은 맑은 물이 흘러 水晶(수정)이라 했는데, 마을남쪽에 서남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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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문화과이형기054)979-6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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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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